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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기보다 갖고 싶던 ‘브레인’ 전자사전

by 라떼는 기자 2025. 4. 18.

학생 광고의 꽃, 공부도 멋으로 하던 시절, 오늘은 오락기보다 갖고 싶던 '브레인' 전자사전을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오락기보다 갖고 싶던 ‘브레인’ 전자사전
오락기보다 갖고 싶던 ‘브레인’ 전자사전

 

 

2000년대 초중반, 교실에서는 조용한 전쟁이 벌어졌다. 누가 더 얇고, 누가 더 컬러풀하며, 누가 더 많은 기능이 들어 있는 전자사전을 갖고 있는가의 싸움이었다.
당시 학생들에게 전자사전은 단순한 학습 도구가 아니었다. 친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지적 스펙’,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던 ‘가장 그럴듯한 IT 기기’, 그리고 가끔은 몰래 게임을 할 수 있는 ‘오락기’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브레인’이라는 브랜드가 있었다. 카시오가 만든 이 전자사전은 단순한 사전이 아닌, ‘멋진 학생’의 상징이자 광고 속에서 누구나 되고 싶었던 주인공이 되게 해줬다.

 

 

공부도 스타일이다: 전자사전 광고의 진화

 

브레인 전자사전은 광고 전략에서 철저히 10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잘해야 한다”가 아니라, “멋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핵심이다.
초기의 전자사전 광고는 주로 부모를 타겟으로 한 신뢰 기반 이미지였다. "우리 아이 학습 능력을 향상시켜줍니다" 같은 문구와 함께 차분한 분위기의 컷들이 많았다. 하지만 브레인은 이 공식을 깨버렸다.

브레인의 광고는 마치 휴대폰 광고 같았다. 얇은 두께, 컬러 LCD, 음성 발음 기능, MP3 재생까지. 당시로서는 놀라운 스펙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사용하는 ‘멋진 학생’의 모습을 강조했다.
광고 속 학생은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머리는 깔끔하지만 센스 있는 헤어스타일, 교복에 살짝 드러나는 브랜드 운동화, 그리고 손에는 반짝이는 전자사전. 심지어 독서실이나 도서관 같은 배경도 마치 드라마처럼 감성적으로 연출됐다.

“지금, 공부도 스타일이다.”
이런 슬로건은 단순히 공부를 잘하라는 말을 넘어, ‘어떻게 공부하는지가 나를 말해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스펙과 감성의 공존: ‘전자사전’의 상품성 마케팅

 

브레인은 기술적인 기능 면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 예문 검색, 한자 필기 인식

MP3 파일 재생

미니 게임 내장 (숨겨진 기능처럼 여겨졌지만, 인기도 많았지)

스케줄러, 메모장, 심지어 계산기까지

브레인은 이러한 기능들을 광고에서 ‘지루하게’ 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성적인 시나리오 안에 기능을 녹였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를 몰라 당황하던 학생이 브레인을 꺼내 단어를 검색하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수업 시간에 자신감 있게 발표하는 모습이 나온다. 또는 ‘좋아하는 친구의 생일을 브레인에 메모해 두는 장면’, ‘MP3를 틀며 혼자 복도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처럼, 단순한 제품 설명이 아닌 감정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광고 방식은 단순히 기능 중심의 마케팅을 넘어, 전자사전이 곧 나의 ‘브랜드’가 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브레인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똑똑하고 멋진 학생’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었고, 학생들끼리 “너 브레인 몇이야?” “MP3 들어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됐다.

브레인은 기술을 감성으로 포장하는 데 매우 성공한 사례였고, 광고는 그 핵심 수단이었다.

 

 

교실 속 경쟁과 소유의 문화

 

브레인 전자사전이 인기를 끌던 시절, 전자사전은 일종의 ‘학생용 스마트폰’ 같은 존재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 가장 개인화된 IT 기기였고, 동시에 부모님이 기꺼이 사줄 수 있는 합리적인 ‘공부 기기’라는 점에서 경쟁이 붙기 쉬웠다.

전자사전을 가지지 못한 학생들은 ‘공용 사전’을 함께 쓰거나, 친구에게 잠시 빌리곤 했다. 하지만 브레인 전자사전은 자신만의 설정, 저장된 단어, 메모, 음악 플레이리스트 등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마치 나만의 ‘디지털 뇌’를 들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한때는 일부 학생들이 전자사전 케이스에 데코 스티커를 붙이고, 화면 보호 필름에 손글씨로 문구를 써 붙이기도 했다. ‘전사(전자사전) 꾸미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친구들끼리 브레인을 꺼내 서로 비교해보는 장면은 학교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또한 학교 축제나 학원 이벤트, 심지어 모의고사 경품으로도 브레인이 등장했다. 그만큼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전자사전을 ‘받는 순간부터 공부가 즐거워질 것 같은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브랜드 간 경쟁도 치열했다. 샤프, 캐논, 아이리버 등도 전자사전을 출시했지만, 브레인의 광고는 ‘학생이 원하는 것’을 가장 정확히 읽어낸 덕분에 오랜 시간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브레인은 갖고 싶었다
브레인 전자사전의 성공은 단순히 제품의 성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광고 속에서 그들은 ‘공부하는 삶’조차도 멋지게 포장했고, 학생들은 그 삶의 일부가 되고 싶어졌다. 공부를 위한 도구가 아닌, 공부하는 나를 멋지게 보이게 해주는 도구였기에, 브레인은 그토록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해결하지만, 그 시절 전자사전 하나에 담긴 꿈과 자존심, 그리고 ‘브레인을 꺼내는 손’의 떨림은 여전히 아련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그건, 공부보다도 더 간절했던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